숨기지 않는 회화
2024
구나연 (미술비평)
이혜승의 작업실에서 그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몇 해에 걸쳐 수많은 작품을 보아 왔음에도,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감각과 마주쳤다. 눈 앞에 있는 것은 분명 풍경화인데 마치 인물화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림을 그린 당사자의 초상처럼 풍경의 옷을 입고 펼쳐져 있었으며, 거대한 산과 협곡을 접했을 당시, 그가 느꼈을 경외감과 해방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화면에서는 재현의 대상이 된 풍경이 품었을 온도가 전달 됐는데, 그것은 날씨가 아닌 호흡으로 이어지는 냉랭한 대자연 속의 열기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그린 풍경이 꼭 필요한 사람, 그것을 반드시 그려야만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혜승은 오랫동안 풍경을 많이 그려온 화가이지만, 그의 작업은 '그림 같은'(picturesque) 눈의 즐거움과 안온한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도리어 그 풍경 속에는 거친 입자로 된 자연의 생명력과 인적 없는 초현실적 격앙이 가득 들어차 있다. 그것은 어떤 풍경과의 대면 가운데 직관적으로  찾아온 미적 순간을 보유하고, 이를 회화적 예기와 현현으로 이행할 때 개방되는 내면의  정서에서 비롯된다. 예컨대 눈 앞을 가로 막고 선 피오르드의 절벽과 그 사이로 보이는 먼 산의 만년설은 자연에 관한 시적 예찬이 아니라, 거친 붓질로 한 사람이 구축해 들어간 과감한 시선의 건축물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치 이 건축물의 자재처럼, 조밀하고 켜켜이 겹쳐진 색획은 어떤 난해한 구조의 풍광도 빚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역동적 잠행으로 엉키어 있다. 하여 그의 풍경은 대자연 속에서 거침없이 전진했던 열띤 시선과 작업실 안에서 붓질의 궤적으로 직조되어 간 회화 사이의 방대한 거리감이 결합된 장소이다. 
 이 점에서 내가 그의 풍경화를 인물화처럼 받아들인 이유를 스스로 납득하게 된다. 그가 그린 풍경은 화가 자신의 신체를 통해 온전히 미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대상임과 동시에 화가의 주체가 지향하는 무엇인가를 가득 이입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결코 아름다운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풍경은 자연의 무심한 어느 일부를 미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누군가에 의해 인양된다. 이혜승이 회화로 인양한 풍경은 그가 일상에서 느낄 수 없는 추상적인 감각들의 외적인 총체로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회화에는 분명 선호하는 구도와 시점이 있다. 이것은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화면의 내부를 가로지르는 두 개의 큰 산을 축으로 원경과 근경을 나누는 구도. 둘째, 실내와 풍경이 대비하며 공존하는 구도. 마지막으로 산이다. 
 2024년 오에이오에이 갤러리에서 열린 이혜승 개인전 <머무는 듯 흐르는>에 전시된 두 점의 <무제>(2024)는 유사한 구도를 갖고 있다. 화면의 좌우로 솟아오른 경사진 산 사이의 원경으로 눈 덮인 봉우리가 보이는 것이다. 100x200의 큰 스케일의 작업은 화면 아래로 길이 이어지고, 이보다 작은 50x60의 작업은 화면 아래로 계곡물이 흘러내려 온다. 두 작업 모두 보는 이를 화면의 안으로 들어오라 말을 걸 듯이 전자는 흙길로, 후자는 물길로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그 길과 물을 따라 자리한 좌우의 협곡을 마치 문처럼 지나가면 머나먼 설산의 고도로 갈 것만 같다. 우리는 그 풍경이 얼마나 크고 높은 것인지 짐작만 할 뿐이지만, 길의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면 그것은 자연의 모습을 한 누군가의 자의식이 만든 지도임을 깨닫게 되는데, 이는 화가가 원풍경과 마주하며 느낀 세계에 대한 어떤 이해와 반응을 응시하는 일이다. 또한 그의 풍경 앞에서 우리는 자연이라는 세계가 지닌 비장한 숭고를 감지하게 되는데, 그것은 친절하지도 따듯하지도 않으며, 칠흑 같이 어두웠다가 하늘처럼 밝은 빛을 발하는 변덕을 구사하며, 두려움과 감격이 어지럽게 혼재한다. 이런 이유로, 눈 앞에 있는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화가가 구축한 자연의 구조는 우리 삶의 성질과도 유사한 높은 줄타기를 연상시킨다. 이것이 그가 선호하는 첫 번째 구도가 지닌 힘이다.
 한편 이혜승이 선호하는 구도 중에는 실내에서 바라본 풍경이 있다. 역시 <무제>(120x150)인 이 작업은 검은 실내의 창(혹은 사각의 구멍)과 그 너머 문득 눈에 띤 풍경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보는 이를 실내에 두고 저 앞으로 우리의 시선을 안내하는 창 밖의 풍경은 그리 절경도 비경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실내에서 보이기 때문에 특별해지는 그런 풍경이다. 대신 실내는 무척 검다. 검은 액체가 흐르고 섞이고 스민 것처럼, 자연적인 물질의 현상이 회화적 질료가 펼치는 드라마로 나타난다. 따라서 실내는 풍경을 받아들이는 신체의 반응으로, 먼 풍경을 귀한 순간으로 변화시키는 감각의 원천으로 자리한다. 그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한줌의 풍경은 검은 실내로 들어오는 빛과 같다. 시각 세계를 가능하게 하고, 보이는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빛은 어두운 내부에서 더욱 눈부시게 반짝인다. 이것이 그가 선호하는 두 번째 구도가 지닌 대비의 효과이다. 
 마지막으로 이혜승이 선호하는 구도는 산이다. 그는 "어디를 가도 산이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그가 늘 산이 있는 곳에 있어서가 아니라, 어디서나 산이 그의 눈에 들어오기 때문일 것이다. <머무는 듯 흐르는>에서도 194x227의 큰 화면에 어느 거대한 설산이 꽉 채워져 있다. 이 작업의 화면은 크게 네 개로 분할된 수평의 구도로 구축된다. 먼저 이혜승 특유의 붓질로 채워진 위쪽의 하늘과 설산, 그리고 검은 실내가 그랬던 것처럼 검은 물감의 역학이 반영된 아래쪽의 절벽과 물. 이는 마치 산의 내부와 외부가 쪼개어진 것과 같이 지형과 지층의 빛과 어둠 모두를 포용하고 있다. 본능적인 감정으로 형성된 자연을 보는 듯한 이 산은 차가운 눈에 덮여 있으면서도 뜨거운 주관의 서사를 담고 있다. 따라서 이 세번째 구도는 이혜승이 자신을 확장하여 세계와 접촉하는 상태에 대한 격정적인 알레고리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존재와 직관적으로 대면하려는 그의 요구를 반영한다. 즉 한 사람의 감정을 이입한 산이 아니라, 한 사람의 감각적 충동을 세계의 외양으로 받아들일 때 나타나는 산의 모습이며, 산의 형상으로 부딪힌 세계의 존재에 대한 고양된 인식이다. 
 그러나 이혜승이 특별한 산과 자연을 찾아 나서는 것은 아니다. 목적 없이 접한 풍경 속에서 자신의 회화를 추동하는 감각과 마주하면 그곳의 사진을 찍고, 훗날 작업실에서 사진을 보며 작업한다. 그러나 그 사진 역시 재현의 사실성을 담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제 경험을 환기하며 회화로의 현현을 촉구하기 위함이다. 그에게 회화는 단순히 풍경을 그리는 것을 넘어, 회화만의 언어로 복기할 때만 도달할 수 있는 어느 지점을 찾아 나서는 일이다. 그가 물감과 더불어 자연 소재에서 비롯된 안료를 실험하는 것도, 회화로 구현할 수 있는 자연적 속성을 탐험하려는 것이다. 자연과 밀접한 재현에 접근하는 화가는 자신이 건축하는 화면 앞에서만은 인간을 대표한다. 그는 자신 이외의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고, 어느 누군가 화면 속에 기거할 필요도 없다. 곧 회화 그 자체인 화가는 자신이 목격한 자연의 속성과 세계의 존재 방식에 관심을 갖는다. 그가 선호하는 구도 역시, 풍경이 되기 위한 조건이기 보다, 회화로 구가할 수 있는 투명한 자유의 풍경과 관련된다. 그렇기에 이혜승의 회화는 어떤 가식도 허용하지 않으며, 그 어떤 것도 숨기지 않는다. 
일석화담
ALTER EGO
2016. 4. 13 - 6. 4
작가 노트
전시를 위해 흩어져 있던 그림들을 모으고 조용히 앉아 돌아보니 공교롭게도 정확히 십 년 동안 작업했던 결과물들이 모였다. 십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면 엄청난 양의 그림들이 모였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세어보니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한편으로는 적잖이 실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느 하나 마음을 다하지 않은 그림은 없다는 것에 자부심이 느껴 지기도 했다.
꽃과 식물을 바라보기를 좋아했던 것은 비단 지난 십 년의 시간 동안만은 아니었다. 어린시절 뒤 산 가득 피어나던 탐스러운 아카시아 꽃송이들, 꽃송이 하나를 따면 내 작은 두 손 가득 차고 넘치던 하얀 보드라움, 달콤한 향기. 그 풍요로움의 기억은 나에게 여전히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렬한 것으로 남아있다. 문득 뒤를 이어 또 하나의 유년의 기억이 떠오른다. 마당이 있는 집으로 처음 이사를 갔던 해, 아버지는 시멘트로 덮여 있던 마당의 바닥을 깨고 그 자리에 흙을 퍼담아다 잔디를 심었다. 햇볕에 누렇게 타서 곧 죽을 것만 같던 그 듬성듬성한 잔디가 어느 순간 힘있게 줄기를 뻗고, 마침내는 온 마당을 푸르름으로 뒤덮었던 모습이 아직 선연하다.
세월이 흘러 뒷산이나 앞마당과 멀어지고 나서부터는 꽃이라도 한아름 방 안에 놓아두고 싶은 마음에 봄이 되면 어김없이 꽃집에 들러 화분을 들여오곤 했다. 흙에서 싹이 돋고 꽃대가 올라와 망울이 맺혀 마침내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그리고 그것이 지고 천천히 말라 스러지는 모습까지도, 하릴없이 앉아 오래도록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이 때의 시간은 길고 짧음의 물리적인 시간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바라보는 순간, 오직 그 찰나에만 느껴지는 무언가를 내게 던지는 대상들도 있다. 하지만, 어떤 대상들은 오랜 시간 기다리고 꾸준히 바라볼 때 에야 비로소 자신들의 내밀한 속내를 펼쳐 보이기 시작한다. 다행히도 식물과 자연은 나를 재촉하지 않으며 나에게 기다릴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준다. 꽃이 피어나 시들어 떨어지고, 다시 피어나는 일련의 과정과 모습을 늘 가까운 곳에서 보여주기에, 마음을 온전히 열고 귀 기울여 들으려 한다면, 나는 그들이 내어놓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으며 그 비밀스러운 대화에 함께 참여할 수 있다. 
지난 십 년 간의 그림을 한 자리에 놓고 바라보니, 그들이 지금껏 들려준 수많은 이야기들 가운데서, 줄곧 내 마음에 닿아 울림을 만들어 온 것은 어쩌면 이런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들어 가는 속에서 끝까지 빛나는 아름다움, 화려한 꽃망울 뒤의 날 세운 가시, 잘려진 가지에서 힘있게 뻗어 나오는 새로운 가지, 마르고 꺾이고 부서져 이제는 모두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다시 싹을 틔우는, 그 불고 푸른 생명의 힘. 영원의 시간 동안 한 자리에서 꽃과 잎사귀를 틔우고 떨어뜨리기를 반복하면서 굳건히 서 있는 나무들, 그 영험함의 기운. 이들의 계속됨처럼 나의 그리기도 그렇게 계속되기를 내심 바라왔던 것은 혹 아니었을까. / 이혜승

군 말  [一昔花談 ]에 부쳐
거추장스러운 군더더기가 될 것이 뻔한 말 몇 마디를 덧붙이려 한다. 이 글은 다만 전시의 제목에서 떠오르는 개인의 두서 없는 생각에 지나지 않을 뿐, 전시장의 그림을 바라보고 거기에 귀 기울이는 일은 물론 관람객 각자의 몫이다. 
아직은 어떠한 생명의 조짐도 보이지 않는 흙바닥을 연상시키는 一 과, 햇빛을 받아 싹이 돋고 가지를 뻗은 화초가 담긴 화분을 연상시키는 昔이 만들어 내는 ‘一昔’ 이라는 말은 본래 ‘지나간 한 시대’를 뜻하는 단어로서 보통 십 년의 시간을 일컫는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말이 동시에 ‘하룻밤’을 뜻하기도 한다는 점인데, 지나간 한 시절이 마치 하룻밤 꿈결처럼 느껴지는 일이 아주 드물기만 한 경험은 아니라는 걸 생각하면 두 의미 사이의 간극이 그리 커 보이지는 않는다. 더구나 ‘옛날’을 뜻하는 昔에 ‘처음’과 ‘끝’이라는 의미가 함께 들어있다는 사실은 물리적 시간의 궤적을 구부리면서 우리로 하여금 이성의 선형적 흐름에서 잠시 벗어나 꿈의 영역인 정서의 장으로 들어오도록 이끈다.
‘꿈’은 흔히 생각하듯이 항상 덧없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꾸는 꿈은 본래 일상의 정서적 경험들이 우리 마음의 대사과정을 통해 정제되면서 생겨나는, 여러 개의 조각보들로 직조된 하나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꿈은 우리가 현실을 온전히 겪고 살아낸 결과물일 수 있다. 작가는 지난 십 년 동안 스스로가 살아낸 그 현실을, 자신의 경험을, 꽃들에게 들었다는 이야기의 형식(花談) 우리에게 전하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이 이야기(談)는 말하는 이가 듣는 이에게 일방향으로 쏟아내는 언설이 아닌, 고요한 밤에 여남은 개의 숯으로 온기를 낸 작은 화롯불 곁에 둘러앉아 서로 담담히 주고받는 대화에 더 가깝다. 그 대화 속에서, 화로의 잉걸불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생명의 힘을 가진 무언가가 새로이 솟아난다. 
하지만 전시의 제목을 소리 내어 읽어 보면 앞서의 꿈결이나 꽃, 이야기들이 연상시키는 부드럽고 유려한 느낌과는 다소 거리가 생겨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중간의 昔은 경음화에 의해 된소리인 ‘썩’이 되고, 이어지는 花는 격음화가 일어나 거센소리인 ‘콰’로 변한다. 이처럼 둔탁하고 거친 소리의 병치는 다행히 뒤를 이어 나오는 談의 차분하되 유연함을 잃지 않는 ‘ㄷ’소리에 의해 조금 누그러지며, 입술을 부드럽게 닫으면서 마무리 하는 ‘ㅁ’소리 덕택으로 예의 꿈결 같은 여운을 다시 회복한다. 그 여운의 공간은 물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이 새로이 잉태될 수 있는 자린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리듬이 생겨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 리듬은 작가 스스로가 꽃들과 나눈 이야기들 속에서 계속해서 어떤 끌림을 느꼈다고 고백하는 지점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지금까지의 두서 없는 단락을 그러모아 전시의 제목을 아래와 같이 해석한다면 너무 억지스런 일이 될까.
一 [일] : 일어나 제 몫의 아름다움을 누리지만
昔 [썩] : 예의 부드러움을 잃고 썩어 가기도 하며
花 [콰] : 때로는 날 선 가시에 몸 베이기도 하는 꽃들을 바라보며
談 [담] : 서로 담담하게 이야기를 나누다. 
지금 그 대화의 자리에 작가가 우리를 초대하려 한다. / 자유기고가
2014 그림보기
2014. 4.23 – 5.6
Gallery 175
이혜승의 그림은 그리기의 원초적인 시원한 매력이 있다는 것이 첫인상이었다. 그는 공간과 자연을 분리해서 작업을 진행하며, 이번 전시에는 지평선이 끝나는 이국적인 풍경을 그린 그림이 나온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자연이나 공간의 공통적인 느낌은 묵시적이다. 소실점을 향한 그림 풍경 속으로 나는 하염없이 들어간다. – 김지원

작가노트
서울에서 강원도 원주로 이사를 온지 꽉 찬 2년이 조금 넘었다. 강원도지만 원주는 시 단위인 곳이라 내가 작업하고 생활하는 공간은 시골의 분위기가 덜한 편이다. 하지만 아파트 베란다에 나가 밖을 바라보면 멀리 치악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풍경이 보인다. 봄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넘어갈 무렵에는 아침 바람을 타고 집안으로 산냄새가 들어오는데 그런 순간에 ‘아, 여기가 강원도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오후 시간에 8개월이 된 아들과 함께 산책을 나간다. 동네 길들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는 일은 그리 특별할 것이 없다. 산책하는 한 길목엔 동네 할머니들이 용돈벌이 하러 나오시는 작은 좌판 시장이 있다. 좌판에서는 각종 봄나물들, 고춧가루, 된장, 두부 같은 것들을 판다. 냉이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나는 종종 냉이를 사는데 나와있는 냉이를 보면 천차만별이다. 그 중에서 나는 뿌리가 너무 굵지 않고 잎이 싱싱한 냉이를 고른다. 여러 냉이들 중에서 딱 한 할머니의 냉이만이 그렇다. 흙도 곱게 다 털어 놓고 손질이 잘 되어 있어 특별히 따로 다듬을 필요도 없다. 작은 바구니 하나에 이천원이다. 그 냉이로 국을 끓이는 일은, 남편 말로는, 라면을 끓이는 것보다 더 쉽다고 한다. 된장을 풀은 물에 냉이를 넣고 끓이기만 하면 질기지 않고 흙내음이 나는 냉이국이 된다. 
하지만 요즘은 좌판 할머니들도 중국산 나물들을 떼어 다가 직접 캐어온 것이라고 속여서 팔기도 한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대형 마트에 가서 어느 지역에서 왔다는 ‘보증’이 되어 있는 나물들을 산다. 강원도에서 저 멀리 해남에서 온 냉이를 사다가 먹는 것이다. 좌판 시장에서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카드 할인도 없고 작은 바구니 하나에 이천원이라는 그리 싸지 않은 가격에 냉이를 파니까. 대신에 마트에 가서 이미 선별되어 나온 한 종류의 냉이를 가격과 원산지를 간단히 확인하고 적당히 싱싱하다고 생각되는 묶음을 골라서 산다. 여러가지를 비교할 필요가 없다. 기웃거림이 없다. 그곳의 냉이는 하나뿐이니까. 

나는 그림 그리는 일이 좋다. 
내가 어떤 이미지를 선택할 때 거기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내적 필연성이 있다. 그것은 색채, 붓의 터치, 면적 등의 형태를 띠고 드러나고 사람들에게 보여진다. 그것을 말로 더 잘 표현할 수 있었다면 나는 문학가나 수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내가 화가가 된 것은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언어가 그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완성된 그림은 전시를 통해 다른 이들과 소통이 되기를 기대한다. 
나의 그림은 감각이 이성보다 앞 서있는 까닭에, 그림을 보는 사람들 역시 논리를 통한 이해에 앞서 그것을 감각하고 느끼는 정서적인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직관의 영역에 해당하는데, 그런 직관을 얻기 위해서는 다양한 ‘훈련’이 필요한 것 같다. 
여러가지 종류의 냉이들을 보고, 냄새 맡고, 국을 끓여보고, 나물로 무쳐서 씹기도 해보면서 ‘이 냉이의 향과 맛은 이렇구나’. ‘이번 냉이는 저번 것보다 좋네’. ‘다음에는 이런 종류로 골라보아야지’ 같은 감각의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 작은 일상의 감각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좋은 그림을 감상하는 일 역시 어려울지도 모른다. 
전시를 하다 보면 사람들로부터 많은 설명을 요구 받곤 한다.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것은 자유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스스로 무언가를 느끼기도 전에, 작가의 의도 등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행여 그 자신이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어떤 자유를 포기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좌판에서 파는 나물들의 원산지를 믿기 어렵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마트의 인증 마크를 찾아서 소비한다. 혹은 중국산이라고 하면 결코 먹을 수 없다는 단호한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면, 중국산임에도 잘 길러져서 향기롭고 맛이 나는 나물들이 있을 수도 있다. 어떤 고정관념, 선입견에 매여 선택을 포기하기보다는 다양함 속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스스로의 감각을 기르고, 판단을 해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런 연습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좋은 작품들 역시 좀처럼 향유되기 어렵고, 그저 유행을 타는 작품들 만이 사람들의 입소문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다.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고 느끼는 좋은 감상자들의 존재와 따로 떨어뜨려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ICEBREAKER – Norway project
2014.2.7 – 2014.2.19
이혜승은 중부의 고원들을 가로지르는 여행에서 외피 없이 자신의 내부를 날것으로 드러내 놓고 있는 거대한 산들과 그 불균등한 표면을 따라 땅으로 떨어져 내리는 폭포들을 만난다. 눈이 내리면 도로가 닫히는 고원 지대의 아득한 땅에는 수백 년 전에 이름 모를 누군가가 쌓아 놓은 돌무더기들이 군데 군데 흩어져 있고 한 채의 외딴 집으로 이어지는 진흙 길에는 자동차의 바퀴자국이 희미하게 남아있지만 돌들을 누가 왜 쌓았는지, 그 집에는 사람들이 정말 살긴 사는 것인지 같은 구체적인 물음에 우리는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이처럼 이혜승의 그림에는 특정한 화자나 서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내러티브가 빠진 자리에는 적막과 고요가 남는다. 그 고요 안에서 형태 없는 무언가가 어슴푸레한 빛으로 잠시 모습을 드러낸다. 이혜승의 풍경화는 이 형태 없음(formlessness)을 드러내기 위한 작업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원화전
이혜승
2013. 4. 9 – 6.9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김보라 (미술비평) 
어느 시인은 썼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그런가하면 예술창작의 이상적 상태로 절대 고독을 받아들인 카프카는 세 번의 약혼과 파혼을 거듭했고, 파스칼은 “인간의 모든 불행은 자기 방에 혼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라고 말했다. 누구나 혼자라는 쓸쓸함이 있지만, 삶에는 또 얼마간의 고독이 필요한 것이다. 이혜승의 그림을 보면 왠지 고독감이 배어 나온다. 작품에 등장하는 실내, 들판, 운동장은 텅 비어 있다. 아무런 인적도 없고 무슨 일이 생길 것 같다는 기대감조차 들지 않는다. 그는 이렇듯 매우 담백한 화면으로 자기만의 주관적 풍경을 그려낸다. 
이혜승은 이번 전시에서 10여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2005년 주불한국문화원에서의 개인전 이후 국내에서의 첫 전시다. 그의 오랜 관심은 공간이다. 空.間. 문자 그대로 비어 있는 안-밖, 그 사이에 주목한다. 그림 속 공간은 대부분 그의 체험과 결부된 것이다. 지하철역, 갤러리, 강의실, 여행지의 숙소 등이 작품의 소재이다. 그러나 시간이 기억을 생략하듯 이혜승도 대상을 간략화 한다. 각각의 작품은 기억의 체로 걸러낸 이미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작품만 보아서는 그의 공간이 실재인지 상상인지, 구체적으로 어디를 그린 것인지 알 수 없다. 그의 작품은 환영적인 재현공간이 아니라 작가 자신만의 인상으로 새롭게 구현된 감각공간인 것이다. 
깔끔하게 비워진 채로 재배치된 구성에 고립감을 더하는 것은 차가운 색조다. 그가 주로 선택하는 색상은 무채색이며, 채도나 명도를 낮춘 청색과 녹색, 갈색이다. 게다가 전체적으로 옅은 채색은 미완의 느낌을 준다. 하지만 자칫 밋밋해 보일 수도 있는 정적인 구도나 색조에 생동감을 부여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붓 터치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양한 방향으로 칠해진 가벼운 붓 자욱이 드러나고 물감이 자연스럽게 흐른 흔적이 그대로 보인다. 뚜렷한 윤곽선과 분명하게 떨어지는 직선보다는, 유연하게 흐르는 곡선으로 내밀한 유동성의 분위기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움직임과 머무름, 빠름과 느림이 공존하는 화면이다. 이러한 회화적 유희를 통해 작가가 그림을 그린다는 감각적 행위 자체를 즐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그가 안과 밖을 구분하는 혹은 이어주는 공간인 창문, 문, 계단 혹은 통로를 계속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종종 그 안과 밖의 중심은 도치된다. 예를 들어 보스턴에서 눈여겨봤던 옛 건축물을 그렸다는 작품을 보자.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낡은 벽돌건물 안으로 모던한 분위기의 인테리어 공간이 대비적으로 제시된다. 이 때, 보기에 따라서는 불빛 환한 내부가 중심이 되기도 하고 어둠 속에 묻힌 외벽이 주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언젠가 방문했던 누군가의 작업실을 그렸다는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휑하니 비어 있는 내부와 창문 밖으로 보이는 공사현장의 모습은 어느 쪽이 주가 되는 것인지 보는 관점에 따라 역전될 수 있다. 
교차하는 안과 밖처럼 나는 이혜승의 작품에서 비치는 고독감이 결국 그의 강력한 소통의지와 맞닿아 있다고 본다. 그의 고독은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에 비례하는지도 모른다. 소통을 갈구하고 이를 위해 노력한 자만이 소통의 실패, 그 씁쓸함을 깨닫기 때문이다. 공간을 그리는 작가 답게 새로운 공간체험과 여행을 즐기는 이혜승은 5년간의 파리 유학생활을 마치고 이제 막 국내에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펼친다. 감각적 화면을 통해 비소통과 소통 그 언저리에서 미묘한 균형을 찾는 그의 자유로운 비상을 기대한다. 세잔느가 그랬던가. “예술가의 목표는 대중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작업할 수 있게끔 굳센 정신을 지니는 것” 이라고. 자신만의 기질에 따라 대상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보여주려는 길을 가는 그의 노정을 관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다. 
유람기
2011.5.24 – 2011.6.14
곳간.쉼
제주 유람
어디든 돌아다니며 구경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나에게 제주는 어린 시절을 보낸 삶의 터전이기도 했고, 유난히 돌아다니기 좋아했던 내게 더없이 좋은 볼거리를 주는 곳이었으며, 다녔던 곳곳의 추억이 배어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때 그 장소의 곳곳은 이미 변했기도 하고 변해가고 있기도 하고 또 어떤 곳은 변함없기도 하다. 하지만 그 변함없음은 자연 그대로의 풍경 뿐이요 사람의 손길이 닿은 곳곳은 무언가 만들어지고 잠시 쓰이다가 버려진다. 내버려두기 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수많은 변화의 풍경 속에서 마냥 행복하게 돌아다니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주를 유람하면서 느낀다. 
이혜승 개인전: 풍경의 생산 혹은 기원
2010. 5. 1 – 6. 5
IMART 갤러리
강홍구 

풍경이란 하나의 인식 틀이며, 
일단 풍경이 생기면 곧 그 기원은 은폐된다. 
-가라타니 고진
1.
당연한 일이지만 붓이나 연필을 들고 세계를 보는 일은 그냥 눈으로 보는 것과 다르다. 일단 그림을 그리려 들면 대개의 경우 대상은 갑자기 의미를 잃고 형태와 색채로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즉 대상이 개념이 아니라 감각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칸트식으로 말하자면 미적 무관심의 상태라고 할까. 그림이 진행되는 동안 화가는 그림이 그려진 캔버스와 대상을 번갈아 보며 둘 사이의 접점을 찾는다. 물론 그 때 접점이라는 것이 반드시 외견상의 유사성, 즉 닮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들은 극히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보다는 대상과 그리는 행위와 그려진 것 사이의 근본적인 무엇인가가 제대로 되어 가는지가 문제이다. 
바라보는 행위와 그리는 행위를 외나무다리처럼 잇고 있는 이 행위들을 곰브리치는 Making and Matching 이라고 불렀다. 그리는 일의 과정, 결과와 대상을 비교해보기. 메이킹과 매칭은 붓을 놓을 때까지 계속된다. 아니다. 붓을 던져도, 작업실에서 나와도 머리와 마음 속에 남아있다. 때로는 꿈속에서도 보인다. 그리는 자의 숙명이다. 이 메이킹과 매칭은 그리는 대상을 지금 눈앞에서 보고 그리는 사생인가 아닌가 가 문제가 아니다. 사생조차도 어느 순간 대상을 떠나 그림, 즉 눈앞의 실재하는 이미지와 화가의 마음 속에 있는 이미지로 변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가들은 그 변환된, 붙잡을 가망 없는 이미지들을 붓을 들고 추적하는 것이다. 때로는 득의 하고 때로는 망연자실하면서. 

2.
이혜승의 작품들은 풍경이다. 그것은 실내건 실외건 마찬가지다. 그가 그리는 사물, 대상들은 자신의 존재를 크게 드러내거나 주장하지 않고 캔버스 표현에 얇게 겨우 달라붙어 있다. 사실 그것은 물감의 흔적이며 흔적이 모여 힐끗 바라본 풍경이 된다. 이혜승은 사물들, 풍경들을 집요하게 보지 않는다. 보고 지나가거나 잊어버린다. 그러나 어떤 풍경들은 잊혀지지 않고 작가에게 달라붙어 내면화되고 나아가 물감의 흔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혜승의 풍경이 생산되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풍경은 특별한 의미를 획득하는 것일까. 작가는 풍경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이혜승의 풍경은 풍경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간접 체험하게 하기 보다는 풍경과 작가의 내부 혹은 풍경의 기원에 눈을 돌리게 만든다. 이혜승의 풍경을 구성하는 원초적 경험은 제주도이다. 열 살 무렵 이사 가서 살게 된 제주도는 작가에게 깊은 영향을 준다. 제주도, 서귀포 일대에서의 자연친화적 경험은 이혜승의 그린 모든 그림들을 일종의 풍경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혜승의 그림은 그 소재가 무엇이든 모두 다 풍경이 된다. 정물도, 실내도 마찬가지다. 사물들은 낯설어지고 조금씩 떨리면서 뒤틀리고 움직이며 화면 위를 지나간다. 아니면 기억 속을 지나가는지도 모른다. 그 지나가는 것들에 대한 인식, 흘깃 바라봄이 이혜승이 그린 풍경의 기원인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근대적 풍경이란 문자 텍스트적 인식에서의 탈출이다. 동양으로 치자면 시와 산문에서 묘사된 산수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왜냐면 문자화된 풍경은 시각적 자연이라기 보다는 문자화된 자연이며 문자의 번역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의 이념형이 무엇이든 간에 풍경은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고 그에 대한 알레고리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근현대적 풍경은 그 인위성을 벗어나는 것이다. 즉 시각의 재발견 혹은 세계관의 전환이다. 굳이 이처럼 거창하게 말하지 않아도 이혜승의 실외 풍경은 인위적이 아닌 자연으로 이루어진다. 인공의 손이 가지 않은 자연에 대한 체험은 일본에 있는 화산인 아소산과 대만의 양명산 같은 곳에서 이루어졌다고 작가는 말한다. 화산에서 분출된 광물들이 쌓여 이제 막 생성되어가는 대지가 보여주는 생생함과 살아있음과 움직임. 일체의 인공이 배제된 원시의 땅들은 장엄하고 황폐하고 감동적이다. 이러한 충격은 대만에서 본 숲, 아일랜드와 제주의 바다, 바위와 폭포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일종의 지리적인 원형이지 풍경의 원천이며 인간의 손에 길들여진 자연이 아닌 날것들이다. 날것이 주는 자극과 자각은 작가를 충동질하고 표현적인 방식으로 다가가게 한다. 어느 때는 제주도의 폭포처럼 추상에 가깝게 드러나고, 때로는 아소산처럼 재현적인 것에 기댄다. 물론 양자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리는 동안 그에 대한 그림의 대상으로서의 역할 외에 다른 모든 평가가 유보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메를로 퐁티는 ‘눈과 마음’이라는 글에서 다소 흥분한 어조로 ‘오직 화가만이 자기가 보는 것에 대해 평가해야 할 의무를 일체 지니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바라다볼 수 있는 자격을 구비한 사람이다. 화가에 있어서는 지식과 행동의 표어들이 그 의미와 힘을 잃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라고 한 것일까?

3. 
모든 예술이 그러하지만 이혜승의 그림은 본질적으로 낭만주의적이다. 세계 자체를 낭만적으로 본다. 물론 그 낭만은 로맨틱 코메디의 그것이 아니라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나 터너가 보여주었던 것과 유사하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거기에는 있다. 
실내 풍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혜승이 그린 실내는 어딘가 균형이 어긋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닥과 벽, 문틀은 아귀가 조금씩 맞지 않고 모노톤으로 그렸음에도 바닥은 튀어 오르고 벽들은 서로 붙어버린다. 즉 공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평면으로 환원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서 긴장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긴장을 깨트리는 것은 밖으로 통하는 문이나 창문이 있다. 문이 없으면 식물이나 그림들이 있다. 즉 작가는 실내에 있지만 눈은 늘 외부로 통하는 창문과 문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문을 나서면 숲이고, 폭포고, 바다고 화산이다. 
그러므로 이혜승의 풍경은 실내와 실외가 동격이다. 표현방식과 색채 등은 다르지만 실내 풍경은 실외로 나가기 위한 통로이다. 통로인 문을 거쳐 밖으로 나가면 길과 터널이 나타나고 드디어 원시적 풍경에 이른다. 물론 거기 갔다고 해서 떠남과 여행이 끝난 것은 아니다. 여행의 끝은 귀환이다. 현실로 다시 되돌아 가야한다. 되돌아가면 거기에는 실내와 정물이 있고, 또 창문과 문이 어른거린다. 즉 모노톤에 가까운 생활공간인 실내와 원시적 자연이 있는 풍경 사이에서 이혜승은 왔다 갔다 한다. 이것은 현실적인 것과 낭면적인 것 사이에 서 있는 작가의 행적이자 일반인들도 무수히 겪는 보편적인 정서이자 감정이다.
이 감정, 정서가 이미지로 전환되기 위해 화가의 육체와 손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발레리 말처럼 ‘화가는 신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잔이 말했었다. ‘자연은 내면에 있다’라고. 이를 받아서 메를로 퐁티는 ‘우리 앞에 현존하고 있는 사물의 성질, 빛, 색, 깊이 등은 오직 그들이 우리의 신체 속에서 반향을 불러일으켜 놓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신체는 그들을 환영하기 때문에 그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그림이라는 것이 사실은 신체의 연장이며 교환의 체계라는 것을 일러준다. 이혜승의 풍경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가 그린 풍경의 기원은 자연, 사물이자 동시에 자신인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화가는 기억과 사진 속의 풍경, 맨눈으로 보는 정물 등을 캔버스 앞에 놓고 물감들을 짠다. 쉬민케, 렘브란트, 르프랑 따위의 상표를 가진 유화물감. 그것을 녹여줄 알맞은 기름들. 그리고 적절한 캔버스 올의 가늘기에 대해 생각한다. 티타늄 화이트, 징크 화이트를 회사별로 까다롭게 시험해보고 물감의 정성을 가늠해 알맞은 것을 찾아낸다. 사실 화가가 하는 일의 핵심은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캔버스와 물감과 도구들이 그리려는 대상과 잘 맞아 떨어지고, 칠한 물감은 캔버스 위에 적절히 스미거나 착 달라붙어 물질성과 의도 사이에 알맞게 걸려 있을 때 물감은 풍경으로 전환된다. 아니 풍경이 물감이 된다. 
이런 과정이 바로 신체와 사물들이 상호 교환되는 과정이며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물론 이런 과정을 신비화시키고 싶은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지만 할 수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은 인간의 신체가 그러하듯이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본질적으로 환상이지만 거짓말이 불가능하다는 모순은 미술사의 흐름과 상관없이 왜 그림이 아직도 살아남아 있는가에 대한 설명이 될 것이다. 

4.
오래 전에 누군가 말했듯이 논리적으로 보면 그림은 물감을 캔버스에 얹어 놓는 일인데 그 사이의 미묘함이 그림의 힘이고 어려움이다. 어려움의 핵심은 물감과 화가와 대상 사이의 긴장과 균형에 있다. 그것이 무너지면 그림과 화가는 길을 잃는다. 그 길은 있다 가도 없는 미로이다.
이혜승이 지나온 미로를 생각해보면 물리적 거리는 멀지만 심리적인 거리는 바로 창 이쪽저쪽이다. 창밖이 제주도이자 아일랜드이고 양명산이다. 그의 시선이 이제 어디로 향할지 짐작할 수 없지만 한가지는 분명하다. 여전히 캔버스 앞에서 물감을 짜고, 창밖을 보고, 망설이고, 그렸다가 지우고, 흥분하고, 망연자실하고 다시 붓을 들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고? 그것이 그리는 자의 운명이니까. 
이혜승 개인전: 튕겨 나온 시선들
2007. 6. 12 – 2007. 7. 3
IMART 갤러리
김상우 (미학)
​​​​​​​1.
우리는 매일같이 무엇이든 본다. 하지만 비치는 모든 것을 보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짙게 어떤 것은 엷게, 어떤 것은 지워지고 어떤 것은 드러나고, 어떤 것은 못 본체 어떤 것은 알은 체, 나타난다. 관심의 차이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다. 생리학을 끌어들여, 시지각이 어떻 느니, 기억에 남는 것은 어느 정도인지, 설명할 수도 있다. 인간의 기억이 그렇게 단순하면 좋으련만, 그렇게 혼란과 문제가 해결되면 좋으련만, 원하지 않을 만큼 세상은 친절하지 않다. 맘대로 들어와 시선을 흩트려 놓는다. 맘속을 기어이 할퀴어 놓는다. 그렇기에 본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솔직히 축복이다. 안 아플 수 있기 때문이다. 야릇한 노릇이다. 갖지 않아야 조금이나마 행복할 수 있다니. 인간의 기억만큼은 소유의 욕망에서 벗어나 있는 것일까. 그렇게 위로 아닌 위로를 해도, 달갑지 않고 개운치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자신을 어찌 됐든 보호할 생각에, 의식하든 하지 않든 기억하지 않는 것, 그것은 두려운 일일까, 쓸쓸한 일일까. 매일매일, 나도 모르게 나 아닌 어떤 존재를, 나 아닌 어떤 존재가 나를, 잃어버린다. 나는, 너는, 그렇게 서로를 잊혀져 가는구나. 그런 잃어버림, 그런 잊혀짐, 바로 이혜승이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혜승은 무엇인가 그리지 않음으로써 무엇인가 그려낸다. 마치 기억처럼, 마치 찾지 못한 채 어딘가 숨겨져만 있을 옛날의 앨범처럼. 그래서 빈 듯한 여백 이야말로, 그녀의 그림과 기억에 접근하는 열쇠가 된다. 또한 그 열쇠는 우리 모두 갖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2. 
이혜승의 작업을 보면 무엇보다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사람이 등장한다고 해도, 그녀가 ‘온전히’ 사람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아니다) 물론, 그런 그림은 많다. 저 옛날 정물화도 있고, 상품을 채워 넣은 팝도 있고, 아예 개념이 득세하는 작업도 있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제거되는지, 그것의 방법이겠다. 흥미롭게 그녀의 작업은 사람이 없으면서, 사람의 흔적이 짙게 나타난다. 그것도 언뜻 보기에 맥 빠진 것처럼, 어떻게 보면 낮게 가라앉은 것처럼. 어떤 장소이긴 하지만, 어떤 장소인지 분간하기 힘든 곳들, 그녀는 거기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지웠을까. 장소를 하나씩 짚어보면, 실마리가 나올지 모르겠다. 빼곡히 책이 늘어선 서점, 덩그러니 그림 한 장 붙는 어떤 벽, 어둡게 내려앉은 지하보도, 녹음이 빡빡한 바깥이 보이는 실내 등등. 특별할 것은 없어 보인다. 너도 나도 매일같이 보는 풍경이다. ‘매일 같이’, 어쩌면 풍경은 중요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흔히 말하는 일상, 제식처럼 똑같이 반복되는 삶의 몸짓들, 그래서 생각도 못하고, 그래서 느끼지도 못하는 지루한 삶들. 그것은 보는 것이되 보지 못하는 것이다. 마치 가라앉은 기억처럼 짓눌려서. 어쩌면 망각은 마취제일지도 모른다. 고통을 잠시 동안 눌러 놓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래된 ‘안과 바깥의 범주’가 요긴하리라.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바깥이 아니다. 바깥은 그녀의 안이 나타날 때 필요한 ‘무엇’ 정도일 뿐이다. 그러니 막연할 수 밖에. 사람은 ‘대명사’와 대화하지 못하지 않는가. 대화가 없으니 따뜻한 교감은 기대할 수도 없다. 그녀의 시선은 그렇게 튕겨 나온다. 
3.
튕겨져 나온 시선들, 시선들, 시선들. 보이지 않는 장막이 곳곳에 펼쳐져, 사람들 ‘사이’를 틀어막고 있는 것일까. 갈 곳을 못 찾은 시선은, 끝끝내 사물로 향한다. 그리고 스스로 사물이 된다. 저 옛날 만물과 ‘공감’하던 정령이 뛰노는 시대로 돌아간 것일까. 그래서 ‘말’하지 않아도 내가 네가 되는 합일과 공감의 세계가 펼쳐진 것일까. 바깥의 손길 때문에 힘들게 ‘나’를 느끼지도 않고, 언제나 결단의 문제 때문에 ‘나’를 괴롭히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우리가 단지 자연의 자녀였을 때 우리는 행복하고도 완전하였으나, 자유로워지면서 이 둘 다 모두 잃고 말았다.”(쉴러) 모르겠다. 서로의 두뇌를 잇는 전선이라도 있다면 가능할 지도. 하지만 문제는 그것 뿐만 아니다. 오늘날 인간이 접하는 사물은 친근한 자연이 아니다. 맨발을 부드럽게 감싸는 대지가 아니다. “이러한 자연은 더 이상 내면성을 일깨우지 못하는 경직되고 낯설게 된 의미의 복합체, 즉 이미 죽어버린 내면을 모아 놓은 시체실이다.” (루카치) 우뚝한 콘크리트 벽들, 창문을 가득 채운 벽들, 이혜승의 그림엔 그런 벽들로 채워져 있다. 바깥은 벽들 사이에서 겨우 자신의 ‘있음’을 알릴 뿐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그녀의 창문에 비친 바깥이나 벽들 사이에 나온 바깥이나, 온전히 바깥처럼 보이질 않는다. 시제는 당연히 ‘과거’다. 그것도 날짜를 매길 수 없는 막연한 과거다. 인공의 벽들은 나이를 먹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도 흔적이 남지 않는다. 그렇게 이제는 기억마저 자연의 빛깔을 잃어버린다. 그림의 서늘한 빛깔처럼, 깨끗이 탈색돼 버린다. 그녀의 ‘창문’에서 공간은 막히고 시간은 빛이 바래는 것이다. 
4.
“과거 속으로 멀어짐에 따라 진실성도 줄어든다. 그래서 지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다.” (로브그리예)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과거를 마음에 묻고서 살아갈까. 헤아리지 못하는 것 이야말로 축복이리라. 그녀는 화면에 보이지 않는 익명의 무덤을 만든 것이다. ‘산 것’을 ‘죽은 것’으로 바꾸며, 아니 그렇게 바뀌어 가는 것들을 쓸쓸히 떠나 보내며, 혼자만의 의식을 치러낸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만들지 않는 것은, 그녀의 그림뿐이리라. 더불어, 그것이 예술에게 여전히 남아있는 실낱 같은 힘일 것이다. 
여백을 그려내는 시선
김보라 (미술비평) 
바깥세상은 속도를 감지하기도 힘들만큼 빠르게 움직인다. 속도에 발맞추다 보면, 종종 풍경을 바라보는 일을 잊기도 한다. 볼지언정 느끼지 못한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비단 일반인뿐이 아니라, 요즘엔 작가들 또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스토리가 배제된, 이물도 없는 풍경 그 자체를, 또 사진도 아닌 유화물감과 붓으로 옮기는 작업이 진귀해져 버렸다. 젊은 작가들에겐 더더욱 그럴 것이다. 자칫하면, 주제의 부재, 혹은 매체의 진부함으로 오인받을 가능성도 다분하기 때문이다. 작가 이혜승은 이러한 선입견, 오해 등에 대해, 유창한 언어 대신 자신만의 회화의 시간으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이질적인 것과 공명하다
그는 쉽게 말해 ‘풍경’을 그리는데,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분명 출처가 있는 풍경 같기는 하지만 익숙하지 않고 이질감만 느껴진다. 도대체 작가는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그렸으며, 무엇을 지웠는지 자꾸 실마리를 찾게 된다. 그렇지만, 어둠이 깔린 지하보도, 벽과 창문, 덩그러니 빈 공간에 걸린 액자, 숨 막힐 정도로 나무가 빼곡히 들어선 숲, 혹은 산 등 아주 평범한 풍경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상에서의 기억 대신, 꿈이나 막연한 몽상을 하게 된다. 이 모호함에 넋이 나가 개념을 찾고자 시도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화면을 지배하는 물리적 요소들, 색, 붓질, 두께 등에 집중하게 되는데, 꽤나 매력적이다. 그는 안과 밖, 밝고 어두움의 명암 대비를 물감의 농담과 물감의 여러 겹의 층으로 조절하는데, 여기서 피그먼트의 밀고 당김의 긴장감이 적극적으로 드러난다. 붓질의 속도와 방향의 율동감도 즉물적이다. 그런데 또 작가가 물성만을 드러내려 했다고 하기엔 확신이 없다. 분명 작품엔 사람도 없고, 개념을 강조한 것도 아닌데, 결국은 사람 냄새가 난다. 작가의 내적 태도와 그의 시선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가 작품을 대하는 내적 태도와 방식은 그 자체도 인식하지 못한 채 체화 되어버린 경험을 토대로 한다. 일전에 작가와의 대화 중 그가 10살 때 서울에서 제주도로 이사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한국의 중심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섬마을, 제주도로의 이동은 분명 작가에게 이질적 경험이었을 것이다. 제주도는 서울과 다른 풍경과 문화, 그 지역만의 다른 언어를 가진 곳이기 때문이다.
이질적인 것을 경험하고 해석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그 하나는 이질적인 것이 그것을 경험하는 이를 압도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이질적 경험이 자신의 내적 세계에 만 침잠해 있는 상태로 실제로는 외부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경우이다. 이 두 방식의 중간 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질적인 것에 압도당하지 않으면서, 그것과의 교류와 흐름이 중단되지 않고 지속되는 방식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지만 폭력적이지 않고, 잔잔하지만 고착되어 있지는 않은 상태, 한마디로 공명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이것이 이혜승의 작품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이다.
“아주 어린 나이도 나이고 그렇다고 이미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서서히 굳어져 가는 나이도 아닌, 열 살 때 제주도로 내려가서 10년 가까이 생활했다. 한국어이지만 동시에 매우 다른 방언을 사용하는 곳, 같은 나무가 자라고 같은 종류의 새들이 날아다니기는 하지만 검은 돌담과 오름이 있고 바람이 부는, 이국적인 동시에 이국은 아닌 곳이 제주도이다. 제주도는 나에게 감당할 수 없는 충격으로 나를 급작스럽게 흔들어 놓지는 않았지만, 항상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가끔은 안개 낀 곳에서 길을 찾아야 하는 모호한 공간을 남겨두었다. 그 공간 안에서 이전의 나의 존재와 기억은 흔들리지만, 압도당하지 않는 상태로 새로운 경험과 만나고,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고 공명했다”
서울-제주도로의 이동을 통해 세상을 인식하는 새로운 시각과 자신만의 틀을 만들 수 있었다. 그것을 모호함과 일종의 여유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일상에서 애써 다름을 찾아내려고, 혹은 개념을 끌어내려고 하지 않아도, 범상한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일찍이 배운 것이다. 그는 자연 풍경을 담을 때도, 도시 풍경을 담을 때도 특별한 것을 찾지 않는다. 여행이나 일상을 통해 시선이 머물렀던 곳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스쳐 지나가는)을 사진 혹은 기억으로 담아서 화폭으로 옮길 뿐이다. 겨울에도 푸른 풀이 자라나던 제주도의 ‘녹색’ 기운은 작품 어딘 가에서 고개를 들고, 수평으로 확 트인 공간도 항상 잔잔히 움직이며 작용한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녹음 짙은 숲도 평면적이고 완만한 곡선을 드러낼 뿐 별 말이 없다. 

모호함과 여유의 공간
제주도에서의 경험과 삶을 통해 그는 이질적인 것을 경험하는 방식을 체화 시켰고, 그것은 이후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일종의 스타일, 혹은 특이 되었다. 이후 그는 “파리에선, 유럽 어디든 쉽게 갈 수 있으니까요” 라고 선택한 파리 유학 생활을 통해 새로운 경험의 수많은 소재들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에콜데보자르의 자유로운 교육환경은 그가 이전까지의 작업 방식을 존중하고 그것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게 해주었다. 어떤 ‘강요’나 ‘제약’도 없는 환경에서 그는 진정 자유로움과 자신감을 얻었다. 심지어는 그가 교수에게 “한국에서는 내 작업에 대해 일러스트 같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고민이 된다”고 했더니, 교수의 답은 “신경 쓰지 말라”라는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학생, 혹은 작가에게 그가 추구하는 방식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는 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는 학교 수업에 많은 시간을 보내는 대신 새로운 것을 찾아 “여행”하곤 했다. 그에게 새로운 곳은, 마음만 내키면 언제든 기차를 타고 떠났던 유럽의 낯선 여행지일 수도 있지만 일상의 아주 평범한 공간이기도 하다. 
미술관 복도, 특별할 것 없는 강의실, 친구의 작업실, 지하 차도 등의 평범한 공간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예를 들면 복도와 창문, 실내와 거울, 실내와 창문 등 안과 밖으로 볼 수 있는 두 개의 다른 공간을 가지고 있으므로 선택된 특별한 공간이다. 더 단순히 말하자면 ‘벽’과 다른 무언가가 짝을 이룬다. 클래식한 나무 기동과 전면 거울이 부착된 강의실의 풍경은 거울을 통해 왜곡되고, 생략을 거쳐 평면화 되는데, 이 벽면에 마티스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액자 하나는 거울에 비추어졌으면 반대로 걸려야 할 것 같은데 멀쩡하게 걸려있다. 일견 벽면과 그곳에 부착된 액자로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다시 보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불가능한 구조다. 그런가하면 실험실로 보일만큼 차갑고 깨끗한, 투명한 큐브 공간 가운데에 액자로 추정되는 것이 하나 그려져 있다. 그 액자 안의 풍경 또한 벽면과 동일한 색조이지만 원근법이나 명암으로 보면 분명 창문은 아닌 것 같다 (작가가 참고한 사진에서 창문과 그 밖의 풍경임을 확인했다.). 이 작품 에서처럼 작가는 인공의 콘크리트 벽을 이상하게끔 투명하게 표현한다. 그리고 통로로 여겨지는 창문, 문, 빛, 바깥 풍경 등은 불투명하고 두껍다. 결국 외부로의 소통은 차단되었고, 그 빛만이 콘크리트 바닥 위로 반사되는데, 그 바닥은 물을 머금은 듯 깊게 느껴진다. 여기에서 안과 밖의 구분은 무의미 해지며, 제 3의 공간이 생겨나는 것이다.
창문이나 통로, 문, 계단, 두 개의 다른 이미지들을 같은 평면 안에 놓아두는 이러한 작업 들에서 외부와 내부, 그 만남 혹은 마주침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공간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새로운 공간은 반드시 실재하는 두 공간 사이에서 존재하는 것일 필요는 없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가 어떤 사물이나 풍경들, 혹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을 경험할 때는 언제나 이런 공간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공간들은 정신적이고 내재해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간다면 내재해 있기 때문에 두 공간의 병치가 결국엔 불필요해질 수 있다. 
그의 최근 작업들은 공간의 병치를 찾기가 힘들다. 안과 밖인 듯하나 무엇을 안으로 혹은 밖으로 봐야할 지 더욱 모호하고 평면화 되었다. 농담, 명암의 대비도 거의 중성화 되었다. 아마 이제 작가 스스로 공간을 표현하는 기법에 자신이 생긴 것 같다. 공간의 병치나 명암의 대비, 붓질 등의 물리적인 힘을 얻지 않고도, 몸에 익힌 감각으로 그리고자 하는 공간과 화폭사이의 관계를 알고 이해하는 것이다. 작품이 한결 가벼워지고 있다. 안과 밖을 구분하기 위한 물감의 얇은 수많은 층들을 거둬냈을 뿐만 아니라, 공간을 왜곡시키지 않고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단서들도 그대로 남겨둔다. 바라보는 입장에서도 편안하고 숨도 쉬게 된다. 
그의 녹색의 자연은 생명을 잃고 퇴색되어 있으며, 콘크리트 도시 풍경은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자연은 쓸쓸히 항상 그 자리에 있고, 콘크리트는 사람의 온기를 머금은 탓일까. 지금은 인공의 자연이 실재가 되는 시대이다. 작가는 풍경을 묵묵히 그러냄으로써 바뀌어 가는 가치들에 애잔한 감정을 싣는다. 그런데 그는 조심스럽게 안타까워할 뿐, 정작 자신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 여유와 자신감이 부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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